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아 민주 공화국 (문단 편집) == [[러시아 SFSR]]의 위협과 전쟁 == 1919년 2월 14일 조지아는 81.5%의 득표율로 조지아 사회민주당이 승리하는 선거를 치렀다. 그 후 3월 21일, 조지아는 지역 볼셰비키 운동가들이 일으킨 무장 농민 반란에 대처해야 했고, 러시아 SFSR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압하스인]]들과 [[오세트인]]들과 같은 소수 민족들에 의해 수행되었을 때 더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토지 개혁은 마침내 조지아 사민당 정부에 의해 잘 처리되었고, 볼셰비키가 세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다당제]] 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사법제도 및 지방자치의 개혁이 실시되었고, 개혁으로 압하지야는 자치권을 부여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 문제는 특히 오세트인들에게 계속 문제가 되었다. 1920년은 러시아 SFSR의 위협이 증가한 해였다. 남러시아군의 패배와 [[붉은 군대]]의 캅카스 국경으로의 진격으로 공화국의 상황은 극도로 긴장되었다. 그리고 동년 1월, 러시아 SFSR지도부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에게 남러시아와 캅카스의 백군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했다. 조지아 정부는 중립과 비간섭 정책을 언급하며 어떠한 군사 동맹에도 가입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조지아가 러시아 SFSR에 의해 독립을 인정받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정치적 해결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지역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려는 여러 시도들에 의해 뒤따랐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20년 4월, 붉은 군대 제11군은 아제르바이잔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했고, 조지아 볼셰비키 세르고 오르조니키제는 러시아 SFSR에 조지아로 진격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비록 [[레닌]]과 [[소련 장관회의]]의 공식적인 동의는 없었지만, 지역 볼셰비키는 1920년 5월 3일 쿠데타의 예비로 트빌리시 군사학교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크비니타제 장군에 의해 성공적으로 격퇴되었다. 그 결과로 조지아 정부는 동원령을 선포했고, 간자에서 일어난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반란에 대한 조지아의 지원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러시아 SFSR군은 조지아 영토를 침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짧은 국경 충돌로 크비니타제에게 격퇴당했다.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에서 평화 회담이 재개되었다. 5월 7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따라, 조지아의 독립은 볼셰비키 조직의 합법화와 조지아의 땅에 외국 군대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동년 12월 16일 [[국제 연맹]]에서 조지아에 가입하는 것에 대한 투표가 열렸고, 결의안은 부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